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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직장선교주일 관련자료

국내선교부 2004-10-11 (월) 20:00 20년전 2391  

 2004년 직장선교주일(10월 17일) 총회장 목회서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문안드립니다. 

10월 셋째주일(10월 17일 주일)은 전국의 모든 교회가 총회직장선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난 제85회 총회에서 10월 셋째주일을 1,500만 직장인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증거하고 민족 복음화를 이루기 위하여 총회 직장선교 주일로 제정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하루의 8시간 이상을, 일생의 30-40년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삶을 직장에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장인들이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직장을 단순히 생업의 장이 아니라 선교의 현장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는 주님의 말씀은 삶의 현장인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생명의 빛을 비취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의 다원화된 직장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직장을 더욱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시켜 가야할 것입니다.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어가는 과정속에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인 직장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도록 직장선교회를 조직하고, 전도대상자들을 위해 통전적 접근을 계획해야합니다. 이를 위해 지 교회들은 평일 정오예배 및 직장인을 위한 쉼터 선교등을 통해, 복음을 증거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 교회별로 직장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인들을 교육하여 직장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회 차원에서는 직장선교사역을 전담할 수 있는 전담목회자를 파송해야 합니다. 1500만 직장인 복음화를 위해 전국 교회의 참여와 기도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총회직장선교주일을 지킴으로서 직장 사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전국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고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지럽고, 혼란된 사회속에 교회가 세상의 소망의 역할을 감당해야합니다. 이러할 때 직장선교가 활성화되고, 한국사회가 변화되고, 민족과 세계의 복음화가 이뤄지리라 믿으며, 모든 성도님들과 전국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4년 10월 17일 

         총회장 김태범

 

 직장선교의 이론적 근거

강사 : 문 영 용 목사 

      본 직장선교의 이론적 근거를 정리하고자 직장선교에 대한 교회론과 개념, 성경적 근거, 신학적 근거, 역사적 근거, 순으로 생각하겠다.

     

  A. 교회론

      모든 교회는 그 교회론이 분명해야 한다. 직장선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헌법 제2장 제7에 정의된 교회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를 나타내신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이다. 이 무리를 가리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라 한다'고 했다(김봉익,1999:170).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엡2:19), 그리스도의 몸이다(엡1:23,4:12, 골1:24).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의 개념이란 근본적으로 각 시대에 따라 주어진 교회의 형태에 의존한다고 했다(Küng,1970:21-22). 즉 시대마다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상이 정립된다는 것이다(최병곤,2000:14). 이런 의미에서 이제 본 논제는 교회의 사명에 따른 교회상 몇 가지를 제시코자 한다. 특히 본 직장선교회는 성전중심교회와는 여러 상황이 다르므로 흩어지는 교회의 상황에서 논하고자 한다.  

 

    1. 흩어져 평안을 선포하는 교회               

       교회는 본질적으로 복음을 설교하고 전도해야하는 선포적 사명을 갖고있다. 

칼빈은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존재한다’ 고 했다(Calvin,1995:418).

그러기에 예수님은 12인의 제자교회를 이루시고 그들에게 손수 전도의 시범을 보이시며 수시로 선포의 사명을 지시하시고 그 사명을 어떻게 행하였는지 낱낱이 보고도 받으시었다(막6:30). 결국 주님은 그들에게 땅 끝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도록 사도로 파송하셨다(행1:8). 그러므로 호켄다이크 교수는 ‘복음과 사도직은 근본적으로 둘이 합해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한 ‘사도직을 통해서 복음은 완성되고 나아가 그 목적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Hoekendijk,1975:40). 이런 의미로 교회를 사도적 기능으로서의 교회라고도 했다. 여기에서 한가지 강조할 것은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려면 전도자와 활동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들과 초대교인들의 흩어짐은 복음과 교회의 확산을 의미했다. 따라서 교회가 모이기만 하고 성숙한 흩어짐을 모르면 그 교회는 본질적 선포사명을 잃은 것이다. 교회의 복음 선포시 중시해야할 두가지는 복음 전도의 주체와 그 목적이다. 

전도의 주체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시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이 메시야에게 기대하였던 평화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평화의 왕이요(사9:6), 그가 평화가 될 것이며(미5:5),우리에게 평화의 계획을 실현하실(렘29:11)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설교도 평안의 도래를 선포해야 하며, 교회가 흩어져 전도할 때도 평화를 심는 작업이어야 한다(Hoekendijk,1975:16-17). 특히 직장 안에서 선포하는 직장선교회의 복음은 반드시 평화의 복음이어야 한다. 이는 직장선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활동원칙이다. 단, 이 평화는 긍휼과 진리 그리고 의와 화평 등이다(시85:8~13).   

 

    2. 흩어져 봉사하는 교회

       교회는 본질적으로 봉사적 사명도 갖고 있다. 디아코니아(δίαΚονία)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식탁에서 봉사하는 의미이다. 실제로는 2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는 주님의 성찬식에서 봉사하는 것이요, 둘째는 교회에서 궁핍한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집사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나왔으며 궁핍한자의 식사를 위해 준비하는 자이었다(Anna,1999:강의록).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역(ministry)이란 말도 라틴어 ‘ministerium'에서 유래한 말로 봉사 혹은 섬김의 뜻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Ministerium Verbi Dei 라는 개념을 교역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교역의 개념은 본래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부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할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윤철호,1998:37). 이와 같이 교회는 본래부터 봉사 생활과 깊이 관련되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유념할 것은 봉사란 필요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감이 없이 결코 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눅10:25~37). 따라서 교회가 어디든지 필요한 곳에 봉사자들을 흩어 보내지 않는다면 그 교회도 본질을 상실한 교회이다.

       봉사는 섬김의 정신이다. 즉 종의 정신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로 태어나셨고(빌2:6~7), 죄인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고자 구유에 누우셨으며(눅2:7~),

섬김의 본을 보이시려고 십자가에 물과 피를 쏟으셨다(빌2:8). 그리고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쫓을 것이니라(눅9:23)’ 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삶을 잘 전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이며 철저히 봉사의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봉사의 정신으로 생활 전도를 해야 한다. 여기에서 호켄다이크 교수는 ‘교회에서 전하는 평안의 도는 겸허한 봉사 속에서 실증된다’고 했다(Hoekendijk,1992:22).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참다운 교회란 이웃과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능동적 백성이라고 했다(Worley,1996:19) 

그리스도인들이 직장 안에서 참다운 활동교인으로서 교회상을 세우려면 전도 또는 친교보다 직무생활과 동료생활 간에 봉사적 자세를 늘 가짐이 최상의 비결이다. 

 

    3. 흩어짐 속에서 통일하는 교회 

       교회의 본질은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엡1: 

23,4:12, 골1:24). 또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인 것도 그의 여러 서신에서 강조하고 있다(롬12:5, 고전12:27, 엡5:30).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몸’ 으로 확정하였음을 본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요(골1: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 임을 강조하였다(롬12:5, 고전12:12~30, 엡5:30).

       이와 같이 바울이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특별히 강조한 것은 ‘교회의 통일성과 조화를 강조하고자 함’ 이다(Dulles,1992:43). 바울 사도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함’이 하나님의 최고의 뜻임을 수시로 강조한다(엡1:10,4:1~6, 빌2:9~11).

       교회는 많은 종류의 지체처럼 참으로 다양한 구성체이다. 특히 각 직장 안의 선교회는 더욱 다양한 구성체이다. 여기에서 교회는 그 모든 다양한 요소를 한 공동체로 조직하려면 조화로운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롬12:5)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이다(엡4:12). 그래서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붙은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일성 있게 이루어야 한다(고전12:12).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의 상호 협력적 집합 인격으로서의 교회 개념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구성체를 조화롭게 통일하여 나간다면 반드시 다양한 구성체에 못지 않은 다양한 결실들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함께 일하며 살아있는 지체들은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도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Worley,1983:69). 이런 의미에서 직장선교회의 다양한 통일은 폭발적인 복음의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직장선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계층, 직무, 재능, 교파 등을 고려하여 효율적으로 재구성하는 회원간의 조화로운 통일과 비 직장교회와의 연대적 통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현 교회가 시급히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B. 직장선교의 이론적 근거

       본 직장선교의 이론적 근거를 정리하고자 직장선교에 대한 개념과 성경적 근거, 신학적 근거, 역사적 근거 순으로 생각하겠다. 

 

    1. 선교와 직장선교의 개념

       선교의 본래적 개념과 변화, 직장선교의 개념과 중요성만을 정리하겠다.

       첫째, 선교의 본래 개념은 “선교”라는 용어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 선교는 라틴어 “mitto(보낸다)”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헬라어 “아포스텔로(ἀποϭτελλω)”와 “펨포(πεμπω)”에 해당된다. 아포스텔로는 135회, 펨포는 80회가 각각 신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 뜻은 “파송”을 의미한다(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1988:5). 영어 "misson"이나 “missionary"는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되었다. 영어의 missonary는 13C 천주교의 수도원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세상에서 사도의 생활과 사역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를 지칭하였다(박영호, 1988:13).

       둘째, 선교개념의 변화는 16C 개념에서부터 생각한다. 16C와 17C에는 천주교회가 없는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받은 자들에게 “선교사”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전호진,1985:20).

       20C초까지 선교는 지리적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독일의 선교학자 구스타프바르넥(G.Warneck)은 “선교란 비기독교 세계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복음전파이다”라고 정의했다(전호진,1985:20). 여기에서 말한 선교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선교로 보는 극단적 전통적인 개념이다. 그후, 이 개념은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시대마다 논의되던 중 오늘날에 와서는 국가적 영역을 넘는 것보다 문화적 영역과 관련하여 선교를 강조한다. 맥가브란(McGavran)은 선교란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했다(McGavran,1983:16).

        한편, 현대는 단순한 복음전파만이 아니라 교육, 문서활동, 사회활동 등 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이 땅위에  이루실려는 뜻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모두 선교 활동이라 포괄하며, 이를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ary)라고 정리한다(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1998:6).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20여년동안 특수 선교를 감당해 온 나는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교회를 세울 목적으로 어느 지역이든 비기독교 문화 속에 기독교 문화를 심고 그 문화를 확정해 가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한다.

       셋째, 직장선교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선교학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직장 선교학은 아직 개척단계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이론이나 관련 서적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직장선교의 공인된 개념도 없다. 다만 직장선교 현장에서 힘을 다해 수고하는 여러 사역자들의 뜻을 교회론과 선교론을 참조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직장선교란 기독인들이 주어진 직장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섬김을 과정으로 하여 흩어진 교회를 보다 넓게 확장하려는 교역을 말한다. 

       넷째, 직장선교의 중요성은 사역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6가지로 분류했다. ① 직장선교는 예수님의 첫 선교지이기 때문이다. ② 불러모음, 양육, 파송 등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③ 따라서 삶의 현장을 흩어진 교회로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④ 다원화 시대에 걸맞는 다양한 모범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⑤ 일하면서 선교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이기 때문이다. ⑥ 평신도를 참 제자화하는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2. 직장선교의 성경적 근거

       여러 근거가 있으나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근거 3가지만을 생각하겠다. 첫째, 예수께서 첫 제자를 부르신 곳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일터였다. 즉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삶의 현장인 갈릴리 해변 일터에서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행하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들을 택하셨다(마 4:18-22). 그리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사도들이 되었다.

       둘째, 바울은 유럽의 첫 선교를 빌립보의 자주장사 루디아 집에서 시작했다. 결국 바울은 루디아의 일터를 발판으로 거대한 유럽을 기독교화하는 역사를 이루었다(행16:11-15). 이런 의미에서 루디아의 장사집은 직장선교회의 선구지라 할 수 있으며 또한 루디아의 직장선교는 빌립보와 유럽 복음화에 지대한 기초 공헌을 한 것이다.

       셋째, 바울은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동행하며 직접 장막 깁고 선교했다. (행 18:1-4)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도 이런 선교 방법을 수시로 강조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 첫째로 바울은 모범적 선교방법임을 강조한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4-35). 즉, 바울은 일하면서 선교하는 것을 매우 존귀한 모본으로 확정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직장선교는 참으로 모본적인 선교이다.

 

    3. 직장선교의 신학적 근거

       직업의 개념과 흩어지는 교회의 개념, 직업 영성의 개념으로 정리하겠다.

       첫째, 직업의 개념은 일반사회적 개념과 기독교적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직업을 “부르심” 또는 “소명”이라고 한다. 단, 이 부르심을 단순한 직업(occupation), 직업(profession), 상업적 일(business) 등에 단순히 종사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장종원,1985:37).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의 소명은 어떤 사람을 특정한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고자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두란노,1997:8). 예를 들면 이사야서의 말씀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문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 6-7)” 함과 같다.

       또한 소명은 에베소서 4:1~3과 같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소명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소명은 거룩한 소명(holy calling), 하늘의 소명(havenly calling)으로 통하고 구원과 직결된다. 

       한편,  바울은 소명을 기독교인의 일상적인 일(daily work)에 적용시켰다. 또한 루터(Luther)는 이 소명을 직업에 연결시켰다(두란노,1997:9). 단, 이것은 단순히 세속화시킨 것을 의미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가면으로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

       어쨌든 기독교의 소명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영적인 의미이며, 세속적인 직업의 의미는 분명히 이차적이다. 그러나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결되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차원에서 귀중히 알고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며 일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따라 응답해야 한다. 단, 모든 직업이 기독교인에게 소명일 수는 없다. 특히 남에게 해가 되는 직업은 절대 피해야 한다.

       둘째, 흩어지는 교회의 개념에 대하여 호켄다이크는 “흩어지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선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화목케 하려는 도구로 쓰시고자 온 세계에 보내셨다는 선교적 사명을 계속 상기시킨다 ”고 강조했다(Hoekendijk,1975:44).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모여 있는 공동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므로 흩어져 가정과 직장에 있을 때에도 교회의 지체이며, 따라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세상 속에 현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있을 때에도, 이웃을 만날 때에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즉,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정치생활, 문화생활 등에서도 교회로서의 정체성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직장선교회는 흩어진 교회들의 최전선 군병들인 것이다.

       셋째, 직업 영성의 개념은 오성춘의 기독교 영성과 함께 연관해야 한다. 

오성춘은 기독교의 영성을 3위일체 하나님을 중심 하여 사는 삶이요 그분의 생명으로 넘치는 삶이라고 했다(오성춘,1999:21). 즉, 하나님과의 관계한 삶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 영성의 3가지 측면을 강조했다. ①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의 공급을 받으며 사는 측면이요, ② 믿음의 사람들을 공동체 속으로 불러들여 서로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측면이며, ③ 기독교 정체성을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측면이다.

       직업 영성은 이중 ③ 측면과 밀접하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직장 속에서 교역을 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인들은 자신의 직장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통치가 임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인은 오성춘의 논제대로 아래의 직장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오성춘, 1999:22). 

ꊱ 직장은 가족을 위한 십자가이다. ꊲ 직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역의 현장이다. ꊳ 직장은 하나님의 선교지이다. ꊴ 직장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기는 것이다.

 

    4. 직장선교의 역사적 근거

       일반교회사적 근거와 한국교회사적 근거, 특수선교사적 근거로 정리하겠다. 

       첫째, 일반교회사적 근거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온 지역에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전적으로 후원을 받는 전임 사역자와 직업을 갖고 자신의 생활을 해결하며 전도한 자비량 전도자들이었다. 이 양태는 중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특히 339년부터 448년까지 조로아스터(Zoroaster)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때 수십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또는 추방당했다. 이 때 추방된 그들은 도처에 흩어져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이득수, 1996: 55).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도 인도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더 나은 항로를 발견할 열망으로 탐험길에 나섰다가 미대륙을 발견했다. 그래서, 어거스트 클링(August Kling)은 콜럼부스를 전세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평신도라고 극찬했다(이득수,1996:57). 이외에도 선교의 열정은 있으나 선교비 후원을 확보하지 못해 동인도 회사의 사목으로 입사하여 인도 선교를 행했던 헨리 마틴(Henry Martyn,1781-1812)과 그 일행들, 성 도마(St. Thomas)섬의 원주민들을 사랑하여 “직공의 도구를 어깨에 메고 세계의 선교지로 어린양을 따라 가자”는 표어아래 자비량 선교하던 모라비안(Morabian)의 선교사들, “나의 사업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용을 벌기 위해서 구두를 만든다.”라고  말한 영국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1761-1834)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비량 선교사들(Tentmaker)의 헌신적 활동은 초대교회부터 오늘까지 교회사의 줄기를 끈질기게 이어 왔다.

       둘째, 한국교회사적 근거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직장선교의 효시자는 알렌의 의료선교사 라고 할 수 있다.  알렌(Horace N.Allen)은 1883년 의사면허를 취득한 후 곧 미국 북장로교회에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여 25세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에 나섰다. 얼마후 그는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한국 선교에 뜻을 품고 1884년 9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미국 공사관 푸트(General Lucius Foote)의 협력으로 월급 없이 일하는 공사관의 의사가 되었다. 이는 알렌이 공개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없던 당시 형편으로선 가장 알맞는 일자리였으며, 합법적으로 가장 좋은 선교활동의 방법이었다. 얼마후 알렌은 우정국 난동 사건으로 큰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살려내어 고종의 시의로 임명을 받고 참판 벼슬까지 얻게 되는 신임을 크게 받았다. 

       이때부터 엄격하게 금기해 오던 서교도라도 미국서 보내온 선교사라면 왕실에서부터 호의를 가지고 묵인하며 돌보아 주었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독교는 단시일 내에 급 발전하였으며 이외에 교육, 의료, 학술 등의 근대문화를 이 나라에 접목시키는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했다(김인수,1998:133). 더욱 놀라운 것은 1885년 4월 5일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언더우드(Horce G. Underwood)목사도 의료선교사 헤론(J. W. Heron)과 스크랜톤(W.B.Scranton) 등과 함께 알렌이 이 땅에 세운 첫 병원 제중원에서 함께 일하며 복음을 전파했었다(김인수,1998:139). 당시 한국에서는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이처럼 의료선교로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 선교역사는 의료직장 선교사역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셋째, 특수선교사적 근거이다. 

       기독교 선교형태의 일반적 분류에 의하면 직장선교회는 특수선교이다. 그러므로 직장선교회를 특수 선교사적으로도 심도 있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직장선교회 전신을 도시산업선교회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직장선교는 일터를 선교의 발판으로 하는 모든 선교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도시산업선교회가 직장선교회의 효시는 분명히 아니며 다만 한국 직장선교회의 초기 형태인 것은 사실이다. 도시 산업선교회는 1957년 42회 총회 때에 산업화되어 가는 공장지대를 선교할 목적으로 총회 전도부 내에 “산업전도위원회”를 설치하며 첫 출발했다. 그후 수시로 변화되어 가는 사회와 교회에 부응하여 1971년 9월 56회 총회 시 도시산업 선교위원회로 개칭되었고, 1983년에는 산업 전도위원회로 다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도시산업 선교위원회로 번복 개칭했고, 겸하여 희망의 전화를 설치함으로 노동상담을 시작했다. 또한 도시산업 선교회는 활동의 중심을 공장근로자 보호에 두었으며, 회사 내에 노사분규가 있을 시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도시산업선교회는 사주와 교회, 정부와 총회로부터 큰 진통을 겪었다. 

       한국교회의 직장선교회는 의료선교에서 부터 시작하였으며 이어 교육선교, 군 선교, 도시산업 선교, 공원선교, 운전기사 선교, 체육인 선교, 복장인 선교 등으로 확산, 분립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정부관련단체, 각종금융단체, 자영업단체, 중계사단체, 제과단체 등에 이르기까지 직장선교회를 점 조직으로 이루고 있다. 

 

 

 

  총회 직장선교 정책 

 

I. 총책

  총회 국내선교부는 직장선교후원회를 통하여 교단 산하에 산재해 있는 각종 직장선교회를 조직적으로 회집하여 상호 협력하므로 그들의 활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게 하고 또한 21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선교현장을 적극 개발하고자 한다.

 

II. 방침

  1. 본 후원회는 가입된 지선교회의 활동을 행정, 재정적으로 최대한 후원한다.

  2. 지선교회의 자립(自立), 자영(自營), 자전(自傳) 운영을 원칙으로 한다.

  3. 총회 국내선교부의 조직된 후원회에 이미 가입한 지선교회는 제외함을 원칙으로 한다.

  4. 본 후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적정한 회비를 납부함을 원칙으로 한다.

 

III. 세부 정책

  1. 조직 정책 : 후원회 조직과 실무위원회 조직으로 양분한다.

    1) 후원회 조직 정책

      ① 현재 직장선교회를 운영 또는 지원하는 교회를 우선으로 한다.  

      ② 본 직장선교회에 관심 있는 기관 또는 개인을 가입토록 최대한 권장한다.

    2) 실무위원회 조직 정책      

      ① 본 교단 목사로서 활동하는 모든 직장선교자를 우선으로 한다.

      ② 총회 산하 노회, 지교회의 직장선교회 조직을 최대한 권장한다.

      ③ 본 위원회에서 추천한 자를 각 노회에 전도목사로 의뢰토록 한다.

  2. 선교 정책 :우선 교회중심선교, 직장중심선교, 봉사중심선교 방향을 기본으로 한다. 

    1) 교회중심직장선교 : 교회가 Office Town등에서 직장인 또 유사 업종인 등을  대상으로 직장선교회를 주관하는 선교   

      (예) 영락 교회, 서소문교회 / 직장인 대상으로

           새문안교회 / 이 · 미용사 대상으로 

    2) 직장중심선교 : 목사 또는 평신도들이 직장현장에서 성경공부, 기도회,예배,

       특별찬양 등을 인도하며 전도하는 선교(개인 직장 전도 포함)

    3) 봉사중심선교 : 기독인들이 직장 현장에서 주어진 직능에 따라 봉사하며 전도 하는 선교

  3. 신학 정책

    1) 신학교 전문교수로 하여금 직장선교 신학을 보다 체계화한다.

    2) 총회 산하 신학교에 특수 선교 과목으로 교육할 것을 권장한다.

  4. 교육훈련 정책 : 직장선교 전문인을 육성코자 기획, 주관한다.

    1) 총회 직장선교 훈련원을 개설하여 목사 및 평신도를 교육한다.

    2) 각 지교회에 직장선교 담당 교육목사를 세우도록 권장한다.

  5. 홍보 정책

    1) 교계신문을 통해 본 후원회의 필요성과 활동사항을 홍보

    2) 총회, 노회시 유인물을 배포 홍보한다.

    3) 순회 헌신예배를 통해 홍보한다.

  6. 복지 정책 : 직장선교자 또는 직장인의 복지를 위해 기획 주관한다.          

    1) 직장선교 상담소를 개설하여 직장인의 결혼, 가정, 건강등을 위해 종합 상담.

    2) 직장선교의 장기적 활성화를 위해 [직장선교 복지센터] 건립을 추진한다.

 

* 직장선교 정책제안에 따른 시행지침

1.단기지침

  1. 조직운영안

     1)우선 수도권, 부산, 광주, 대전등을 중심으로 형편에 따라 지역조직을 활성화한다.

     2)안정된 지역 조직의 조성 후 회사중심, 학원중심, 병원중심등 파트로 한다.

     3)본 회에 소속한 실무 목회자는 그 신분과 선교활동을 총회 국내선교부에서  공인하여 회원증을 발급하도록 한다. 

       총회에서 ‘직장선교훈련센타’(가칭)를 개설하고, 이미 활동하고 있는 목회자는  기존의 경력을 인정하여 회원증을 발급하며, 훈련센타 개설이후 활동을 시작하는 목회자는 일정한 과정을 밟은 후에 회원증을 발급하도록 한다.

  2. 교육훈련안

     1)직장선교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년 1회이상 연구발표 및 재교육을 시행 한다.

     2)전국교회가 직장선교주일(10월 3째주일)을 지키도록 공동설교문을 발송한다.

  3. 후원시행 안

     1)직장선교 실무에 필요한 교회주소록, 직장선교용 책자등은 총회국내선교부에서 공급한다

     2)우선 후원회 소속교회 중심으로 직장선교 실무목회자 위원회에 소속한 전도목사들을 헌신예배에 초청하여 선교현장의 보고를 받고 그 활동을 위한 기도 그룹을 조성한다.  

     3)노회 국내선교부에서 직장선교 후원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한다.

  4. 홍보시행 안

     1)총회 국내선교부의 전교회 공문발송시 직장선교회의 소식과 모임일자등을 동송한다.

     2)직장선교회의 조직과 가입회원 명부와 파트별 및 개인별 선교활동을 소개하는 책자를 년 1회 발행한다.

     3)총회 노회시 유인물을 배포하여 홍보한다.

     4)한국직장선교 목회자 협의회 명부에 총회차원으로 등록한다.

     5)홍보를 시행할 기관으로 총회 국내선교부 안에 ‘직장선교분과’를 조직하고, 

       규모가 큰 노회도 ‘직장선교분과’를 조직하여 이 일을 관리하도록 한다.

 

2. 장기지침

  1. 조직운영 안

   1)본 위원회에서 추천한 자를 각 노회에서 전도목사로 허락해 주시도록 협조 의뢰 한다. (현재는 각 노회의 형편에 따라 전도목사 허락절차가 다름)

     방법 : 후원회 대표 3인, 실무위원회 대표 3인, 국내선교부 총무, 합 7인위원회에서 

전도목사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적절히 심의하여 해당노회에 그 허락을 협조 의뢰 한다.

   2)본 회에서 추천한 자를 각 교회에서 선교직 장로로 임직해 주시도록 협조 의뢰한다.

     이유 ㄱ)정규적인 직장인은 교회 현실상 항존직으로 임직되기가 어려우므로

          ㄴ)직장선교 전략상 선교직 장로로 임직하면 더욱 효과적인 결실이  확신되기에

     방법 : 선교직 장로를 추천하는 해당실무 목회자의 추천과 제안설명에 따라 위 7인위원회에서 그 필요성과 타당성을 적절히 심의하여 해당 지교회의 당회에 임직허락을 협조 의뢰 한다. 단 선교직 장로는 투표로 피택될 때까지 당회에 참석할 수 없다.   

  2. 교육 훈련안

   1)총회 직장선교 훈련원을 개설하여 각 교회 담당목사 및 전문 평신도를 육성한다.

  3 신학운영 안.  

     1)신학교 전문교수로 하여금 직장선교 신학을 보다 체계화하여 적극,보급한다.

       (예)기독교인의 직업과 영성, 오성춘교수 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총회 산하 신학교에 직장선교 과목을 개설하여 교육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

       (예)1999년도 2학기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직업과영성” 과목개설

  4. 복지운영안 : 직장선교 상담소 개설과 복지센터 건립을 추진한다.

  5. 기타 안건

일반 교회목회자와 달리 65세 이전에 은퇴해야 하는 직장선교의 특수성을 고려 하여 기관(전도)목사의 예우 문제를 총회 차원에서 적극 검토하여 대책을 세워 주도록 헌의한다.

 

 

 

 

 

 직장선교와 생명 살리기

 

이 성희 목사

(연동교회, 총회직장선교후원회장)

 

   1. 왜 직장선교인가?

 

   성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은 지난 세기 동안 교회를 지배하던 교회의 구조였으나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평신도 사역의 극대화란 새로운 구조로 급격하게 전환되어 가고 있다. 이전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종속적 관계에서의 협력자이었으나 미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동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미래 교회는 평신도 사역이 극대화되고 평신도 사역을 통한 교회성장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에게 의존되어 있던 목회 패러다임을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교회성장 컨설턴트인 조지(Carl George)가 미래형 교회라고 하는 메타교회(Metachurch)는 소그룹을 통한 교회활동을 강조하고 목회자는 평신도 훈련을 위한 일에 많은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였다. 소그룹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의 중심이기 때문에 소수의 목회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미래교회는 평신도 훈련을 강조한다. 평신도는 교회의 안정적 대상이기 때문에 교회의 관심을 증대할 수 있고 전문가로서 선교의 효과를 증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동역자라는 개념을 목회자들에게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와 심지어 여성에게까지 포괄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 영향을 많이 주지만 언제나 유동적이며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의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목회자의 이동시 교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회의 안정된 구성요소로서 잘 훈련된 평신도는 안정된 교회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이에 이은 그리스도의 베드로에게 대한 말씀은 교회의 주인이 누군가를 분명히 가르쳐준다. 그리스도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수님이 세우신다는 뜻으로 교회의 주체와 소유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소유권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의 교회도 아니며 평신도의 교회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리스도가 주인인 교회이다. 

   교회란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모인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주체가 항상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도 그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평등의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의 개혁의 목표는 탈성직주의와 탈제도주의이다. 루터는 평신도의 사제성과 보편적 사제성을 강조하였고 만인제사장설을 주창하였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복음은 모든 신자들의 소유물이며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장직을 제사장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공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평신도들은 복음에 의하여 그것의 이중 형태인 말씀과 성례전을 위한 사제들이 되는 것이다. 말씀을 소유한다는 것은 사제직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며 사제도 그 직책의 소유자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직책을 떠나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당시에 성직자들에 의하여 독점되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들어오게 하였다. 

   기독교의 불후의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기독교강요’는 평신도인 칼뱅에 의하여 저술되었다. 그는 방대한 신학적 주제를 성직자나 신학자의 입장이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저술하였고 개인의 성경연구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John Wesley)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를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여 평신도 운동의 합리성을 그의 신학으로 선포하였고 나아가서 평신도 설교자(lay preacher)의 필요성까지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영향으로 평신도 설교자가 있었다. 

   오랜 로마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칭적인 의미를 가진 일반 교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평신도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평신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한 하나님의 도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교회의 봉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위하여 평신도는 선교와 교육 등 다양한 교회의 봉사업무들을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건을 확립해야 할 것이며 평신도가 교회의 안정적 주체인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로마교회의 성직 중심적 구조나 성직 계급적(hierarchical) 사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초대교회에는 제1선은 아니지만 제2선에서 1선의 지도자를 도와 교회를 유익하게 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바나바, 마가, 누가, 디모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등이다. 이들이 없이 초대 교회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교회에 대한 공헌은 컸지만 이들은 한번도 사도라고 불린 적도 없고 사도가 아니라고 불평한 적도 없다. 또 이들의 일로 보아 사도 가운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다대오나 시몬 등의 제자들보다 훌륭한 일을 하였고 성경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가 사도들 보다 낫다고 하지 않고 사도라는 이름을 원치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잘 한 평신도들이었다. 특히 바울은 누가를 극진히 사랑하여 함께 일을 하였고 누가도 데마, 그레스게, 디도가 바울을 떠날 때에도 바울을 떠나지 않고 바울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딤후 4:10-11). 그리고 1차 전도여행에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서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선교에 방해가 되었던 마가도 성장하게 되어 바울은 그를 유익한 사람이니 데리고 오라고 한다(딤후 4:12). 이런 인물들은 한결같이 제2선에서 제1선의 사도들을 충실히 도와 교회가 교회답게 만든 모범적 평신도였다. 

 

   평신도는 성직자의 동역자이어야 한다. 동역자(synergos)란 ‘함께 일하는 자’ 혹은 ‘도와주는 자’란 뜻으로 평신도는 성직자와 함께 일하는 자로서 동반적 성격을 지닌다. 특히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동역자란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공존적 관계이며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의존적이 아니라 상호 보족적이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가정이 교회의 원형이었고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동역자’(롬 16:3, 고후 8:23) 혹은 ‘주의 일에 힘쓰는 자’(고전 15:58)라고 불렀다.

   바울에게서 동역자란 그의 제자들과 동사자들에게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에게 동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우대함으로써 교회에서의 그들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바울은 그의 제자들인 디모데(롬 16:21), 빌레몬(몬 1), 디도(고후 8:23),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몬 24) 등을 동역자로 불렀고 그 밖에도 우르바노(롬 16:9), 글레멘드(빌 4:3)와 아볼로(고전 3:9)도 동역자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에게도 동역자라고 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동역자 개념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고 함께 하나님의 일에 일하는 사명과 사역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에게서 동역자의 개념은 사도와 사도 아닌 자의 차이를 극복하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극복하며,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복하게 하였다. 

   위와 같은 성경적 요인 외에도 미래 교회는 평신도 중심이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그것은 국가나 기업이나 조직에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미래 현상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조직의 중심은 항상 관료적 체제에서의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국가에서는 행정수반이 중심이었으며 영향력이 가장 컸고, 기업의 중심은 사장이었으며 조직의 중심은 조직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산업사회의 중심구조가 정보사회에서는 하부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서도 행정수반 보다 국민이 중심이며, 기업도 사장이 아니라 사원이며, 회사가 아니라 고객이며, 조직도 조직의 장이 아니라 조직원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간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이제는 서서히 평신도 중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고 있으며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그러므로 평신도 훈련이 목회의 중심사역으로 변화하며 잘 훈련된 평신도를 많이 가진 교회가 미래 사회에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최근의 기업에서는 고객만족 경영의 중심이 되는 고객 중심적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고객만족이란 설명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현실이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회사중심이었고 고객들은 회사의 결정대로 따라가는 형태였으나 이제는 고객의 의향에 따라 회사가 따라가는 형태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나라에서는 3차 산업에서는 수준 급으로 발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사무소와 은행 등의 변화이다. 동사무소도 근래에는 문화공간 내지는 놀이공간으로 변모하고 은행도 갖가지 고객중심의 편의성과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변화의 동향은 직접적으로 교회 경영에 영형을 주고 교회로 하여금 변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그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직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 구조로 조정이 되어야 한다. 구조조정이란 기업이나 행정기구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한국 교회가 21세기의 사회구조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며 미래인의 사고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미래인의 몸에 맞는 교회로 조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구조조정이 곧 평신도 중심의 교회 구조로의 전환이다. 

   실제적인 면에서 평신도는 다양한 전문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성직자가 가질 수 없는 전문적 영역을 평신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신도의 잠재력은 성직자 개인이나 교회에 굉장한 힘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다양한 기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 제한을 인정하고 평신도가 가진 다양한 기능을 교회를 위하여 이용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21세기 연구에 대하여도 성직자가 가지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란 제한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평신도의 기능을 이용하면 훨씬 발전적인 21세기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교회와 성직자 개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또 미래 교회는 자연히 성직자 중심의 구조에서 평신도 중심의 구조로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적 중심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그들의 직장은 중요한 삶의 자리이며 삶의 자리인 직장을 선교의 장으로 인식케 하고 직장 선교사로서 사역을 수행케 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새로운 선교 사역의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도 하다. 

 

   2. 왜 생명 살리기인가?

 

  최근 세계의 정보화 과정은 많은 사회적 부작용이 공존했던 것을 경험하였다. 이런 부작용은 세계의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지구적 현상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일차적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수많은 정신적 가치의 손상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지난 날 우리의 현실이었다.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는 국민 일반의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달성되었지만 재벌을 중심으로 한 부의 집중화는 결국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사회기형을 낳게 되었으며 이 일차적 목표달성을 위하여 독재라는 절대권력을 용납하고 인권은 억압되고 이러한 정치체제는 자연히 민주주의의 가치와 절차를 외면하고 사회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능력마저 잃게 되었다. 산업사회와 사회의 근대화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을 경시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란 가치보다 삶의 양(quantity of life)이란 물질적 가치관을 가지게 만들었다. 

   위와 같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근대사회로의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는 결국 사회를 위험사회로 전락시켰으며 물질위주의 사고방식은 위험사회를 가속화하였다. 성수대교의 붕괴,  지하철공사장 가스폭파, 삼풍백화점의 붕괴 등 하늘과 바다와 땅에서 줄줄이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사망자의 수는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최근에 약간의 감소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매년 10,000명이 넘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가진 나라이다. 이러한 위험사회의 가속화와 대형사고와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되었다. 이런 다발적 대형사고는 결국 생명경시로 이어지고 “죽었다”는 말에 대하여 둔감하게 만들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위험사회의 정체는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다. 복합적 원인에서 발생한 위험사회는 외형적이고 물량적인 성장을 지속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결과와 이익에만 몰두한 결과이다. 현대 문명의 문제점을 위험사회의 개념으로 분석한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Ulrich Beck)는 재난은 모든 사회가 경험하는 것으로 이제 위험은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순간의 결정이 엄청난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의 지속성으로 위험사회를 정의한다. 실제로 이제 위험이나 재난이란 국지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문제이며 세계는 재난에 공동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1997년 한해는 특히 엘니뇨현상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기상이변으로 많은 세계적 재난이 있었다. 엘니뇨는 2002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비보를 접하고 있다. 홍수와 극심한 가뭄과 진로를 상실한 태풍 등이 세계를 재난의 현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재난들도 결국 생명에 대한 경이감을 상실하게 하고 대형 재난과 사고를 통하여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과학의 꽃은 생명공학이라고 한다. 유전공학은 두 가지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달하였다. 한가지는 식량난 해소이고 다른 하나는 불임의 해소이다. 이런 과학적 노력은 생명공학의 가정을 증명하는데 기여하였으나 이와 더불어 또 다른 역기능이 발생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생명복제라는 것이다. 분명히 나이스비트(John Naisbitt)의 말대로 21세기는 생물학의 시대이다. 그리하여 온실효과, 기업성장, 기업진단, 컴퓨터 바이러스, 증후군, 진화 등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물리학의 시대인 20세기와 엄청난 차별화를 과시하듯 생명의 존엄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생명복제의 가능성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1993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의 제리 홀(Jerry Hall), 로버트 스틸먼(Robert Stillman) 두 교수는 하나의 배자(胚子)를 48개의 새로운 배자로 세포분열을 통하여 인간 복제의 가능성을 열었다. 1997년 2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가 복제 양 돌리를 공개함으로서 생명복제는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유전공학의 새 장이 열렸다는 환호성과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복제인간의 탄생이 멀지 않았다고 우려하게 되었다. 돌리는 생식세포를 이용한 복제가 아니라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돌리는 1998년 초에는 어미가 될 것이라고 로슬린 연구소는 발표하였고 과학자들의 생명조작과 희롱은 계속되고 있다.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미국의 오레곤에서는 1997년 8월 복제 원숭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가운데 지난 해 말 미국의 유사 종교단체인 라엘리언(Raelian) 산하의 클로네이드사에서는 인류 최초의 인간복제 아기가 탄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배자 세포 복제소 ‘진이’가 태어났고 1999년 체세포 복제소 ‘영롱’이가 탄생하였다. 체세포 복제소 생산에서 한국이 국제적으로 앞서가고 있는 가운데 그간의 실험에서 절반은 기형 등의 문제로 실패하고 절반만 성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영롱’이가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유산되지 않고 태어난 복제소는 1백30여 마리이다. 이 가운데 33%는 사산돼 89마리만 정상적으로 태어났다. 그나마 11마리는 심장 내 벽이 없거나 간이 정상 소의 두 배에 달하는 등 치명적 장기 기형으로 생후 사흘 이내에 죽었으며 10마리는 원인불명의 설사로 생후 한 달을 전후해 죽었다. 또 수태율은 9.2%에 불과한 반면 유산율은 정상소에 비해 여섯 배 이상 높아 동물복제에 상당한 기술적 허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성공하면 젖과 고기가 많이 나오는 아주 우수한 소가 된다.

 

   이런 동물복제가 잇따라 성공하므로 이제는 인간의 복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유치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과학의 발달이란 순기능과 함께 반드시 역기능을 초래하게 되었다. 생명복제기술의 발달도 예외는 아니다. 노벨은 길을 닦기 위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지만 대량 인명살상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원자핵의 발견은 인류사회에 엄청난 변화와 이익을 가져왔지만 인류의 자멸의 길이 되었다. 과학은 항상 인간의 문화와 삶의 진보와 더불어 파괴와 멸망을 동시에 가지고 온 도구이다. 복제 양 돌리를 만든 유전공학 회사인 PPL사는 양의 복제 성공으로 계속 인간을 위한 계획들을 발표하고 있다. 유전자 이식동물, 인간의 모유와 똑같은 성분을 가진 대용우유, 인간 이식용 장기를 가진 동물의 생산 등을 잇따라 발표하지만 이러한 인류에 대한 공헌과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신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결국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발표한 미국의 두 교수도 절대로 세포분열에 의한 생명복제를 인간에게 적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그들이 실험한 복제술은 노출되었고 누군가가 이 방법을 이용하여 어느 날 복제인간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이란 현대과학의 꽃이면서도 동시에 파괴자이고 축복과 재앙의 두 얼굴을 가진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명이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조작되는 제품의 하나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생명에 대한 윤리적 신학적 해답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문제는 돌리를 복제한 로슬린 연구소 측의 말처럼 태아의 세포분열을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태아가 기형이거나 사망할 위험이 높다고 경고하였고 돌리 복제의 경우도 무려 양 277마리가 희생된 뒤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동물 복제 실패율로 미루어 볼 때 인간 복제의 성공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우며 성공한다 해도 기형아. 정신장애아 등 심각한 결함을 가진 아이로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최근 미국 과학자들이 밝혔다. 또 최근 미국 과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인간복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같은 영장류인 원숭이는 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의 복제 성공률을 근거로 계산하면 복제 인간 한 명을 탄생시키려면 1천 번의 임신이 필요하며, 이중 9백99번은 유산, 조산, 사산되거나, 기형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양, 쥐, 염소, 암소, 돼지 등 다섯 종류 동물들의 복제 성공률은 3~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복제 동물들은 대부분 배아 성장 단계나 출생시 또는 출생 후 죽었다고 한다. 살아서 태어난 복제 동물들도 대부분은 며칠이나 몇 주 후 신부전, 심폐기능부전, 면역결핍 또는 신체기형으로 죽었다고 한다. 생명 복제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생명 복제에 대한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 살리기는 시급한 성경적 운동이며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신적 명령이다.

 

   3. 사도로서의 직장인

 

   그간의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 교회의 성장이 현 수준에서 멈추고 정체현상을 보인 한 원인은 제자화 훈련에 있다고 본다. 제자훈련이란 듣고 말하는 훈련으로 문자 그대로 제자로 만드는 훈련이다. 그 결과 한국교회 교인들은 듣기를 매우 좋아하고 말도 잘하는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배우는 자체로 만족하는 교인들이 많게 만든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배우는 자’로서 제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도가 되도록 훈련하여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의 전기를 제공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제자란 문자 그대로 배우는 자이다. 반면에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헬라 세계에서는 전권대사(ambassador)를 의미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많은 제자


제 109회기 총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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